Saturday, March 7, 2009

『3.1절특집』 독립운동가 이효정의 “나의 이야기” 보도자료

항일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이효정은 동덕여고보 재학 중 발생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조하여 동맹휴학을 주도,무기정학을 받는다.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이효정은 잠시 울산의 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요시찰 인물로 찍혀서 강제로 사직당하고 경성(서울)으로 올라와 사회주의 노동운동가 이재유가 주도한 <경성 트로이카> 조직에 가입해 경성 최대의 공장이었던 종연방직 파업을 이끌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1개월 동안 투옥된다.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주도했던 <경성 트로이카>는 핵심조직원만 200명, 연루자가 1,000명에 달했던 1930년대 최대의 항일운동조직이었다. 이들은 엄혹했던 일제치하에서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해 연쇄파업을 일으키는 한편 학생들과도 연계해 대규모 학생시위를 일으킴으로써 일본경찰에게는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이효정은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다가 교원노조사건으로 2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돌아갔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남편은 여운형과 박헌영이 이끌었던 건국준비위원회 울산 대의원으로 좌익활동을 하다가 남로당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한다.

2남 1녀의 자녀와 함께 남한에 남겨진 이효정은 교직에서 쫓겨나 “빨갱이 가족”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호떡장사, 공장 노동자, 과일장사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간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남편이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월북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그때부터 이효정은 요시찰 인물이 돼 수시로 사찰기관에 연행돼 고문과 취조를 당하게 된다. 냉전시대 공산당 남편을 둔 여자의 삶에 인권은 사치였다. 영장 없이 끌려가기를 수십 차례.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지는 장애를 입으면서 억울한 옥살이도 감수해야 했다.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이효정에 대한 사찰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효정은 팔순이 넘긴 나이에 자유를 얻어 문학회에 가입해 시집을 출간하는 등 문학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2006년 정부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독립유공자로 지정된다. 일제치하와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평생을 쫓기면서 살아온 이효정에게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나이 아흔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올해 나이 아흔 여섯. 죽음의 문턱에서 이효정은 젊은 날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경성 트로이카> 조직원들에 대한 회상에 자주 빠지곤 한다. 이효정과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 그들이 이루려고 했던 나라, 남과 북에서 모두 소외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우리나라 현대사가 몸속 깊숙이 새겨져 있는 이효정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통해 굴절된 우리 현대사를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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