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20, 2011

치매를 재현하기-천일의사랑

수애 출연 김수현 극본 <천일의 사랑>
마지막회를 보니, 치매 걸린 수애가 기저귀를 차려고 애쓰는 게 나왔더란다. 결국 겉옷 위에다가 기저귀를 붙이려고 안간힘쓰는 장면였다고 하지만.

그리고보니 우리가 치매에 대해 상상하는 게 결국 "벽에 똥칠"이라는 모습이 아녔나 싶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겠다, 라는 우리의 농담 역시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가장 극단적인 표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똥칠이란 우리가 죽음을 상상하는 가장 공포스러운 것.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의 스펙터클.

물론 이 드라마는 수애가 치매를 진단받고, 받아들여 맞서 싸우고, 체념하고, 무너지는 일련의 과정을 다루긴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치매'라는 것이 일련의 '단계'들을 거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저 '벽에 똥칠'이라는 극단적 '결과'를 질병 전체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보니, 이제까지 치매 관련된 건 전부, 이런 완전한 상실의 상태, 즉 단계의 가장 마지막 끝, 결과의 재현에만 집중, 몰입해왔던 게 아닐까 모르겠다. <어웨이 프롬 허>, 일본영화 <소중한 사람>까지. <어웨이프롬허>의 경우, 치매 걸린 알 수 없는 부인에게 충격 받는 남편을 다룬다. 즉, 보살피는 사람. <소중한 사람> 역시 보살피는 사람을 다룬다. '아이'가 되어버린 시어머니를 끝까지 극진히 살피고, 치매라는 질병, 노인을 결국 '아이'로 다루는 며느리. (전철역 시민의 사연 공모 치매걸린 시어머니 부양 이야기처럼) 그러다보니까 결국 치매 환자의 '목소리'와 '생각'은 사라져버릴 수밖에. 그런 '말안되는 말'은 절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천일의 사랑>에서도 내레이션 주체로서 갑자기 김래원이 끼어든다. 수애의 불안하고, 공포에 떠는 독백 내레이션은 이미 사라져버린다. 치매 증세가 악화된 수애는 독백하지 못한다. "아저씨 누구야, 무서워, 저리가!"라는 정신나간 소리만이 들린다. 들리지 않는 생각, 독백, 방백은 사라지고 만다. 아이에게는 생각이 없다. 따라서 가장 가엾게 되는, 생각하는 존재는 김래원으로 전환되는 것.

치매를 다룬 이 드라마 역시 시청자들의 그런 표상을 애초부터 염두에 두었던 것였다. 따라서 벽에 똥칠하는 모습은 어떻게든 드라마 속에 담겨야 하는, 치매라는 질병에 대한 리얼리티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김수현 작가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거다. 어떻게든 '드레수애'라 불릴만큼 우아한 여배우 '수애'와 '똥'을 연결시키겠다는 '악취미'.

이때 <블랙미러> 에피소드 1. 수상 부인이 말한다. "사람들 머리 속에서 이미 당신은 돼지와 성교하고 있다."라고. 결국 '벽에 똥칠하는 수애'는 이미 많은 사람들 머리 속에서 이미 피어오르고 있는 표상이다. 게다가 반드시 보아야만 하는 똥!

치매 재현하기는 결국
-똥에 대한 집착/매혹
-치매 환자를 '아이'로 만들기. '어른 아닌 것'으로 만들기.
-치매 환자 목소리 안 들리게 하기.

Sunday, December 18, 2011

교수들한테 그만 치대야겠어.

반복되는 고백, 학부 신입생처럼 감병받기, 팬심의 발현 이딴 거.
며칠 지나 금세 부끄러워질 그런 것들.

Tuesday, November 8, 2011

어떤 환멸만을

인류학자들이 친절하고 사람좋은 듯 보이는 게 다 이유가 있다. 낯선 필드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문화를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에 대한 평가는 일단 보류하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그 가운데에서 지식이 생산된다고 생각한다. "어, 이상해."라고 평가하는 순간 더이상의 이야기들은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과 완전히 동화한다고 해도 문제가 복잡해지는 건 마찬가지다. 공감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바로 그 마법적 착각의 순간은, 타자에 대한 착취적 식민주의와 종이 한 장 차이다.

페이스북을 하면서 정말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 욕하는 것들이 바로 그거다. 전철 옆자리에 앉았던 예의 없는 사람, 의식 없는 정치인 등등. 물론 나 역시도 이따금, 최대한 언어를 뭉툭하게 해서 타인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음으로써 답답한 마음을 해소한다. 그런데 도무지 불평불만만이 그득한 사람들의 말들이 내 화면을 가득 채울 때는, 인류학자같은 '너그러움'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특히 알만한 사람들이 그럴 때는.

결국 페미니스트 아이들 얘기다. 정말 짜증이 솟구치지 않을 수가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자기가 두른 울타리 안에서 불평만 하다가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자기가 이제까지 살아온 그 안락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 바깥은, 그들에게 모두 적이다. 노무현 생전에 누군가가 했던 "사회 나오면 노빠도 반갑다."라고 했던 건, 물론 '사회'를 특권화하는 발언이긴 했지만, 사실 옳은 이야기였다. 노빠가 실제로 적다는 게 아니라, 그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적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의 해방적 비전을 이 풍진세상에 무리하게 투사하면서 실망하거나, 그런 식으로 매번 젠더 적대만을 읽어내는 똑같은 글들을 복제하는 아이들 때문에 정말 페북 탈퇴할까 싶다.

취업 합숙면접 자리에서 "오빠" 드립에 당황하면서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고 머리도 좀 써 보고, 경험연구를 해서 좀 나 자신을 박살내기도 하고, 그렇게 내가 계속 깨지는 가운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작업들, 그리고 한독협 사람들과의 수많은 밤들. 그리고 나의 성숙한 친구와 성숙한 선생. 이들 아니었으면 나 역시 '환멸'의 놀이나 계속하고 있었을 게다. 다시한번 나는, 나의 지난 '헛짓'들을 후회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 뭔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언제나 나를 괴롭혀왔던 환멸은 사실 '사람'에 대한 환멸이 아니었던 것같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환멸이었다. 그래. 앞으로 '이미지'에 대한 환멸은 하되, 사람에 대한 환멸은 되도록 삼가야겠다. 물론, 이명박 팬클럽인 강남 출신 아이들이라면 좀 어렵긴 하겠다.

이로써 이 글 역시 '불평'하는 글이 되고 마는 이 역설. 사람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고 마는 이 역설. 그래. 나라고 무엇이 더 다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