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6, 2012

나는 방법론의 파괴자

"연구참여자"라는 말은 그들이 그저 교체가능한 인터뷰이 1, 2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참여'가 없으면 연구가 성립되지 않거나 무너져버리는 상황에만 사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하나가 실제로 무너지게 생겼거든.ㅋ

연구참여자, 인포먼트. 이 둘다 결국 그들의 말(뒤)에 진리가 있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포먼트, 연구참여자라는 명명은 결국 이런 인식론적 차원으로 사고되고 분리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존재론(?)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특유성' 자체가 얼마나 연구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들이 얼마나 연구 자체를 '좌우'하는가라는 지점 말이다. 그렇다면 '연구참여자'라는 명명 대신 다른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기형 교수는 덴징한테 그렇게 영감을 받았었다는데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하하.

이론을 해라 비판을 하지 말고.

상대하는 논의 혹은 이론이 결국 자가당착에 불과하다는 수준으로까지 밀어붙이지 않으면, 자기가 비판하려는 이론의 너그러운 통치 따위나 구걸하는 모양새를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다. 흑인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 여성의 목소리가 빠져 있다. 길거리에 미친 여자 하나 나자빠져서 운다. 제발 경찰이 출동해주기를 바라면서.

Monday, June 4, 2012

전주국제영화제와 나

마치 <요세미티와 나> 같은 제목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유운성이 해임됐다. 김은정 전북일보 선임 기자는 몇 년 전에 비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독해진' 모양이다.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우연히 정말 유운성 프로 트윗을 본 것 뿐이었다. 순간 나는 정말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바로 리트윗을 했다. 몇 명 보지도 않겠지만 나름 시니컬한 논평 트윗도 올렸다. 잠깐 동안 어디 신문에 투고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겨레 <왜냐면>은 어떨까, 라고 생각이 미치게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이 감정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고작 투고할 신문이란 게 결국 '한겨레'였던 거다. 전북일보도, 전주일보도, 전북도민일보도 아닌.

전주국제영화제는 나한테 정말 중요한 계기다. 내 삶을 바꾼 몇 개의 사건을 뽑는다면 전주영화제는 언제나 상위권의 자리를 차지해왔다. 나는 심지어 대학원 학업계획서에도 전주영화제 이야기를 적었다. 전주영화제는 10여년 동안 내가 단 두 번 빼고는 매년 찾았던 축제이며, 언제나 기다리고 기대하게 되는 이벤트이다. 어쩌면 내가 한번도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전주영화제야말로 내가 여행 혹은 순례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영화제라는 일종의 충성심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 전주국제영화제가 정말로 '전주'국제영화제였던 적이 없는 것같다. 아아, 김은정 기자는 나의 이 비밀을 간파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Wednesday, May 30, 2012

impossible postcolonial classroom in Korea

왜그런거 있잖나. 미국 대학에 호올로 외국인 학생이 있다고 할 때, 포스트식민 제국의 교실이 그 학생에게 요청/강요하는 역할이 있잖아. 나중에 민망한 후회만 남을 분노가 전혀 쿨하지 않게 발산되고, 어쨌든 정치적인 영감으로 교실이 흠뻑 젖는 그런 순간. 그런데 여기 한국에서 그게 가능할까? 희생양 없이는 영감도 없을 테니, 문화적 타자야 어떻게든 고안해내면 될 일이겠지만 말야. 정체성 정치학은 희생자를 물신화해. 그리고 맨 처음 말하기 시작한 용감한 자는, 마치 연출자의 실수로 방금 찍은 장면을 한번더, 또 한번더 재연/재현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주인공처럼 피로해. 벨 훅스의 교실이 좀더 프레이리여야 하는걸까? 프레이리의 학생들은 요가라도 좀 해야겠어.

Sunday, May 13, 2012

만약 내가 학위논문 주제를 독립영화로 썼다면

입학할 때 공언한 대로,
국제영화제에 대한 독립영화인들의 경험,
뭐 이런 식으로 해서 심층면접/참여관찰[여기서 나는 분명 참여관찰자라 칭할 수 있다!]로 해서
김경묵, 곡사, 이난, 김동원, 이강현, 김동명 등등
말잘하고 똑똑한 이 사람들을 인터뷰해가지고 논문을 만들었더라면

나는 지도교수의 '탈식민주의와 젠더화된 민족주의'에도 부합하고
백승욱 교수, 주은우 선생을 그대로 엮어가지고

아주아주 재미지고 감동적인 말들로 가득한
즐거운 학위논문을 썼을 진대.

토니 레인즈니, 마크 페란슨이니 하는
코쟁이 서구 비평가들을 마음껏 욕하면서
김소영 교수 손도 이따금 들어주고
조영각한테 칭찬도 받고
독립영화계에도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좋은 논문을 쓸 텐데.


나는 어째서 지도교수를 포함한 그 모든 페미니스트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런 논문을 기획해가지고
김소영뿐만 아니라 정성일, 이효인 등등까지 모조리 미워할 예정인
이런 논문을 기획해가지고,
이런 증오를 품은 나 스스로에 대한 증오에까지 휩싸여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일까.

writing sexuality without gender

이건 거의 lipogram에 가까운 헛짓일 터.
그러나 나는 왜 이런 헛짓을 하려고 드는 건가.

Thursday, May 10, 2012

학위논문

나중에 내 학위논문을 본 사람들이
이건 남학생이 쓴 글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Monday, May 7, 2012

세계를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냐.

이 환멸은 결국 나를 죽여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수업에서 교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슬럿워크'에 대해 물었다. 나는 '노 코멘트'라고 말했다. 노 코멘트라고 곧잘 말하던 사내애가 있었다. 그 아이는 뭔가 곤란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을 때 노코멘트라고 말했었다.

사회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많은 선생님들이 강조한다. 내가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는 필드 역시 바로 그러한 액티비즘의 산물이자, 여전히 오만 가지 액티비즘의 당당한 주체이다. 그러나 언제나 나의 고독은 내가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는 데에서 온다. 더 나은 세계를 그리는 이들에 대한 적대에서 내 글은 출발한다고 쓰는 게 차라리 더 옳다. 어쩌면 편리하고도 비겁할 마음으로 나는, 이 세계의 전망을 마냥 장밋빛으로 그리는 이들에 대한 과격한 언사들을 세련된 문장에 감추어 드러내곤 한다. 아니면 그저 노코멘트라고 말하거나, 아예 질문을 받지 않으면 입을 다물어버린다. 세계가 변할 것같아? 절대로 안 변해. 나는, 마치 환멸이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보수당에 표를 던지는 노인네처럼 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나에게 핑계가 있다면, 세계를 위해 글을 쓴다는 그 선한 마음씨, 조화와 화합 같은 보송보송한 말들이 기실 세계의 보수성의 핵심이라는 것일 터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만큼 세계 역시 내게 결코 보송보송한 손길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걱정하기 시작한다. 장학금은 받을 수 있을까. 이래갖고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환멸은 생활의 반대말이었구나.  어떤 이들은 세계가 보장하는 생활을 위해 새누리당에 투표하는 거로구나라고 지껄여본다.

페미니즘 공부가 그저 지겹고 싫다.




Tuesday, March 27, 2012

90년대의 맥락

차우진 트위터에서.

‎87년 해외여행자율화, 90년 일본출판개방(드래곤볼 정식판), 방송법 개정(SBS, 케이블TV), 유니텔/하이텔, 삼성+LG 영화/음악산업진출 같은 걸 빼고 90년대 대중문화와 세대를 얘기할 수 있을까. 근데 아직도 서태지만...

Thursday, March 1, 2012

국가간체계에서 정책 차이의 발생

"헤게모니 국가일수록 자유경쟁, 자유무역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게 되고, 추격하는 국가일수록 보호주의를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히 반주변부 국가에서 보호주의적 정책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해서 앞선 국가들을 따라잡으려는 강한 욕구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상승에 성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겠습니다.
 국가들마다 정책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는 국가간체계의 위계 속에 놓여있는 국가의 위상 차이가 국가가 수행할 수 있는 정책 범위를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백승욱, <자본주의 역사 강의> 195쪽)

주변부 국가 정책 논리의 종속성.

월러스틴과 오늘날 문화생산자 논의의 한계

"월러스틴은 노동의 영역을 실질적으로 포섭했을 때의 변화를 사실상 정치적 포섭의 문제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자유주의에 의해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포섭되어왔는가라는 정치적 차원의 문제로 가지고 가기 때문에, 그 이면에 깔린 문제들로 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따라서 분석이 여전히 분배 차원에 머물러 있고, 생산의 영역으로 파고들어간 것은 아닌데,  이 한계는 브로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브로델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 브로델에게 독점의 문제는 영역이 계속 바뀌어가면서 나타나는 몫의 배분 문제이지, 생산구조 자체의 전화 문제는 아니라고 했죠. 이와 같은 문제가 월러스틴에게도 반복되는데, 그 이유는 앞서도 지적했듯이 월러스틴의 초기 입론이 대부분 농업자본주의에 맞춰져 있다는 것 그리고 분석의 시대가 1840년에 중단된 상태라는 것과 연관될 것입니다." (백승욱, <자본주의 역사 강의>, 244-5)


문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말하는 오늘날 미디어 생산자 연구자들 역시
노동자들의 형식적 포섭과 더불어 실질적 포섭을 논함에 있어,
정치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아닐까?

Wednesday, February 22, 2012

지금은 없는, 사실 이제껏 존재해본 적 없는 소녀에게

http://blog.daum.net/phb3075/2395


바나나파이, 인켈 전축과
들국화, 양희은이 공존하던 풍경을 살던 소녀. 혹은 TWEEN

이 풍경은 정말 존재했던 풍경이었는지?
이 시집의 제목은 <피터래빗 저격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