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25, 2009

독립영화란 있는 게 아니란다


독립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라는 말은, 정말이지 제대로 웃긴 말이다. 이 영화라는 명사는 현실적 사물을 지시하는 한, 독립영화는 그 현실적 범위나 규모에나 한정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독립영화의 함의를 스스로 제한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물론 점이 모여서 선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를 받아들여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독립영화이고, 저것도 독립영화이고...라는 식으로, 우리가 어떤 뛰어난 능력과 식견을 가지고서, 무한정한 리스트를 열거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무한정한 리스트에서, 독립영화라는 함의를 정의해줄 현실적 사물들(“이 영화”, “저 영화”라는 현실태들)이, 고갈되지 아니하고, 끝없이 나열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지만, 현실화되었던 영화들을 붙여 나가면서만 독립영화를 지시해야한다는 것은, 제대로 웃긴 것까지는 아니어도, 여전히 비효율적이고 불쌍하다는 의미에서, 은근히 웃긴 말이 된다. 이것은 마치 말 하나하나를 따먹기 위해서, 세부전술을 운용하다가 전체에서는 패배하는 어이 없이 불쌍한 장기 게임과 같다. 거꾸로 물어본다면, 그렇다면, 점이 모자라면 선이 없다고 말할 것인가? 혹은 굳이 점을 확인해야만 선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한국의 독립영화 판은 이러한 점과 선의 논쟁에 때때로 휘말리곤 했음을 우린 잘 알고 있다. 물론 점이 사라졌으니 선도 끊어졌다고 외쳤던 논객들은, 독립영화의 함의에 대해서 반어법과 역설법을 뒤섞은 값진 응원을 해주었을 뿐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비관조 논리는 증명법보다는 귀류법에 가까운 것이리라. 즉 점이 없으니 선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외면 상 정말이지 저주에 가깝겠지만, 그것은 점이 없다고 선이 없을 수 없으니, 고로 점이라는 전제 자체, 점이 모여 선이 된다는 전제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스스로에 대한 내면적 변증술로 보여주는 셈은 아닐까(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비관조들은 항상 선언의 형태를 가지고 등장한 바 있다. 선언하기, 그것은 결코 설명하기나 묘사하기가 아니라, 증명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증명의 논리를 따라가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있었다(언제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말이지 도처에 있었다(그리고 도처에 있을 것이다). 애초에 우린 독립영화는 자유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이어 신자유주의가,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낭만주의 감성이 밀려왔다. 그 다음에 우린 그것이 저항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이어 자본의 상대적 축적 및 적과 동지가 구별되지 않는 예외상태가 찾아왔다. 때때로 우린 그것이 표현 자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이어, 표현에도 내용과 형식이 있으며, 그것은 다시 좋거나 나쁜 내용, 좋거나 나쁜 형식으로 세부분할된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일례로 독립영화를 정의 혹은 제한하는 경향이 일찍이 불거졌을 때, 그것은 모든 미학적이고, 경제적인, 혹은 정치적이거나 심지어는 윤리적인 테두리들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러한 테두리의 제한은 실패했다는 것은 지금에 와서야 자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영화학교가 더 늘어났고, 영화교육의 채널들이 더 풍부해졌으며, 386이 후퇴하는 대신에 인터넷 세대가 전진했으며, 영화장비들이 경량화되고 접근용이해졌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거꾸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낳는 어떤 힘, 즉 테두리를 제한하는 것만으로는 잘 설명되거나 묘사되지 않는, 차라리 테두리가 섞이는 힘, 테두리를 스스로 제한하지 않는 힘 덕분에 테두리 정하기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테두리를 정하는 시도는 결국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영화의 가능성 덕분에, 실패했다기보다는 실패하기를 성공했다고 말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미학과 윤리, 정치의 범주를 나누는데 실패했으며, 내가 볼 때, 이 범주화 불가능성의 증명이야말로, 한국독립영화계가 그 척박한 현실 속에서 일궈낸, 가장 위대한 업적 중에 하나이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점을 모아 선을 잇는 행태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다음은 분명하지 않은가: 말 하나가 먹혔다고 장기에서 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작업을 관람하지 않고, 몸소 작업을 하거나,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몸소 작업을 하는 것처럼 관람을 빡시게 하는 사람들은 이를 잘 알고 있다: 작업을 할 때 점을 찍기 위해서 작업을 하진 않는다. 그들은 단지 선을 쫓을 뿐이며, 선을 쫓는 그 고집스러운 추격이 점으로 나타날 뿐이라는 것. 이런 점이 있었고, 이런 점이 지금 대세이고, 이런 점이 앞으로 인기있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경험주의 귀납법보다는, 이 선이었어야 하고, 지금 이 선이어야만 하고, 앞으로 이 선이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선험 윤리학 같은 것이 영화제작을 지배하는 것. 마치 이 세부디테일을 쫓고, 저 세부디테일을 쫓다가 마침내 멀리 떨어져서 보면 큰 그림이 뒤죽박죽인 그림, 이 양념을 신경 쓰고 저 양념을 신경 쓰다가 마침내 먹어보면 엉망진창 간이 되어있는 음식, 이것이 바로 선을 추격하는 작업이 끝끝내 반대하고 대척하는 것이다(우린 비평에 있어서도, 이런 구분을 적용해볼 수 있다. 이 간...저 간 참견하듯 보고 다니면서 큰 간을 보지는 않는 비평이 있으며, 반대로 이 간....저 간에는 무심한 듯하나, 언제나 큰 간 보기를 즐기는 비평이 있다). 요컨대, 이 영화가 독립영화니 아니니 하는 것, 더 근원적으로 범주를 나눈다는 것, 그것은 점을 찍는 것인데 반해, 영화는 언제나 점이 아니라 선으로 전개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점 이전에 선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린 결국, 점이 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선이 점을 만드는 것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선이 맘에 안든다면, 접선으로 해두자. 접선은 접점들을 그려내지 않는가. 그것이 점선이라도 좋다. 아니라면, 그것은 언제나 점선이다.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만큼 끈질긴. “이 영화는 독립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제대로 웃긴 말인 것은 위와 같은 논리에 입각해서이다. “독립영화”라는 선은, “이 영화”라는 점으로는 설명되지도 구성되지도 환원되지도 않는....점 자체는 아니어도,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점을 낳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저 영화 바깥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영화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저 영화까지 관류 관통한다. 이 영화는 스크린에 보인다. 그러나 독립영화는 스크린에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감독이 있다. 그러나 독립영화엔 감독이 없다. 이 영화는 관객이 개개인이다. 그러나 독립영화는 역사가 그 관객이다. 이 영화는 언젠가는 파기되고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독립영화는 파기될 프린트도, 잊혀질 네가 필름도 없다. 왜냐하면, 독립영화는 이 영화나 저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나 저 영화 자체를 낳는 선, 힘이기 때문이다.
웃자고 하는 말은 아닐 터, 허황된 말도 아닐터. 권력이 인민에게 돌아가지, 인민이 권력에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존재할지언정, 독립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영화는 이 영화, 저 영화를 비로소 존재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는 현실에 없다. 독립영화는 언제나 잠재적이고,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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